어울리지 않는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던 그 아이의 눈은 형형했다. 그 아이의 주위는 온갖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아이는 그에 취한 듯했다. 형섭아, 인사하렴. 오늘부터 네 동생이 될 우진이란다. 아이는 금세 함빡 웃었다. 저는 그 웃는 낯이 꽤 마음에 들었던가. 잘 모르겠다.
첫사랑 A
박우진 안형섭
작은 도련님은 벌써 일어나셔서 식탁에 앉아 계세요.
이불을 끌어올리던 몸짓을 멈추고 머리를 헤집었다. 도련님. 지금 가지 않으면 자신이 혼난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에 담긴 뜻을 내보이는 보모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곧 내려갈게요.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몇 번이고 저를 쳐다보던 보모가 완전히 이곳을 나서고. 다시 누워버릴까, 하다가 그냥 이불을 젖혔다.
“아가, 일어났구나. 어서 앉으렴.”
새카만 새틴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곧 차가운 물을 내어오는 보모에 고맙다고, 목을 한 번 까딱인 뒤 여자의 옆에 앉아 있는 박우진을 향해 눈을 굴렸다.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준비를 한 모양인지. 박우진은 어두컴컴한 색의 교복을 입고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나비넥타이를 안 한 모양이지. 목 끝까지 채워져 있는 단추에 새빨간 나비넥타이를 상상하다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밥상머리에서 예의 없기는.”
“죄송해요.”
“학교는 잘 다니고 있기는 한 거냐.”
“아버지 생각보다 잘 다니고 있어요.”
“멀쩡히 졸업만 해.”
대학은 어떻게든 넣어 줄 테니. 다시 한 번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막아서고 젓가락을 들었다.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입맛이었지만 아버지가 무어라고 더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우진이 녀석 반만 닮았어도.”
가볍게 목을 까딱이고 2층으로 향하는 박우진에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쯧, 혀를 차는 아버지에 “저도 올라가 볼게요.” 함빡 웃어준 뒤 박우진의 뒤를 따랐다. 새카만 가방을 어깨에 메고 제 방에서 나오는 박우진의 앞에 느릿하게 서니, 아무런 표정 하나 없는 박우진이 저를 내려다본다.
“아쉽겠다. 너네 어머니랑 너. 뭐라도 하나 받아먹으려고 이곳에 들어왔을 텐데. 아버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네.”
“여덟시 십 분인데. 학교에 늦지 않겠냐.”
시답잖은 걱정에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다시 함빡 웃었다. 느긋하게 갈 테니, 먼저 가. 동생아. 가만히 저를 보고 있는 박우진을 지나쳐 가는 동안, 여전히 박우진은 아무런 표정 하나 없었다.
“도련님, 오늘도 지각이시네.”
“교실을 잘 못 들어왔나.”
“작은 도련님은 진즉에 등교하시고 저만치 앞에서 공부 중이신데.”
알게 뭐야. 턱을 괴고 웃는 박지훈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에 앉았다. 힐끔, 쳐다보는 눈빛들에 조용히 뭘 봐, 입모양으로 우물거리니 금세 고개들을 바로 한다. 애초에 덤비지도 못 할 거, 왜 저렇게 관심들인가 몰라.
“너네 교실 안 가?”
“엄마한테 너랑 같은 반하겠다고 어떻게든 우겼어야 했는데.”
“그러게. 아주머니 나 좋아하시잖아. 바로 들어주셨을 텐데.”
“가끔 보면 우리 엄마 아들이 넌지 궁금하다니까. 너네 어머니는….”
“시끄러워.”
꼴에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하고, 괜히 눈치만 보는 박지훈의 팔을 툭 쳤다. 너네 교실이나 가. 두 귀를 막고 한껏 고개를 흔들어 대던 박지훈이 제 책상도 아닌 주제에 책상에 얼굴을 묻는 것을 끝으로 저 또한 눈을 감았다. 비로소 찾아온 평화는 아주 고요했다.
“이야, 형진의 작은 도련님이 이런 것도 보고 그러시네?”
야, 야, 안형섭.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박지훈에 눈을 뜨고.
“안 자.”
“너네 작은 도련님.”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아무렴. 너네 작은 도련님, 성진석.”
어울리지 않는 두 이름에 팔에 묻고 있던 고개를 바로 하니. 박우진의 옆에 껄렁하게 서 있는 놈이 하나 보인다. 아, 저 새끼. 또 시작이네. 한심하다는 듯 박지훈의 목소리가 들리고. 한창 박우진이 들고 다니던 책을 들고 있는 성진석이 보인다.
“한심한 새끼.”
제 말에 박지훈이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본다. 누가 한심하다구. 되묻는 말에 답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한심했다.
제 책을 마구잡이로 넘기는 성진석을 쳐다보는 박우진은 덤덤했다. 마치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양. 히야-. 책을 넘기던 성진석이 책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사내새끼들끼리 사랑하는 내용이네? 우리 작은 도련님, 요새 사랑이라도 하시나 봐?”
“책은 돌려줬으면 하는데.”
“여자가 필요한가? 그것도 아님, 자기 형이라도 사랑하는 건가?”
성진석의 말에 우르르, 제게 몰려드는 눈빛들에 눈을 찡긋거렸다. 저 새끼가. 저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박지훈의 팔을 꼭 잡아당기니.
“큰 도련님은 좋으시겠네. 얼굴 반반하게 생겨서, 자기 사랑해주는 동생 있어. 자기 일처럼 나서는 친구 있어.”
“맞아. 돈도 있지. 권력도 있고. 그런데 진석아.”
너는 그중에 뭘 가지고 있어? 가만히 저를 쳐다보고 있던 성진석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가 푸르러졌다가. 결국 제 분에 못 이겨 책상을 세게 내려친 성진석이 그대로 교실을 나서고 나서야 막힌 숨을 내쉬었다.
“구경났어?”
제게 몰려든 눈빛들에 한 마디를 쏘아 주니. 일제히 앞으로 돌아가는 고개들에 다시 한 번 숨을 내쉬었다. 괜찮냐? 괜찮으냐고 묻는 박지훈에 무어가 괜찮은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박우진을 쳐다보며 천천히 읊조렸다. 괜찮지 말고.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통 입맛이 없는 것 같네.”
“아니요, 괜찮아요.”
“맛이 없으면 다른 걸 시키면 된단다.”
고상한 척, 하얀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찍으며 한껏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여자를 쳐다봤다가. 제 앞에 마구잡이로 썰려 있는 고기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박우진 또한 영 입맛이 없는지, 포크에서 손을 떼고 아직 한참 남은 고기만 쳐다보고 있다. 아무렴. 이 자리에서 입맛이 있다는 게 이상한 거지.
“요즘 무엇을 하고 다니는 거냐.”
“학교 다니고, 붙여주신 과외도 하고,”
“뭘 하고 다녔길래, 성진수가 네 안부를 묻냐는 말이다.”
글쎄요. 억지로 쥐고 있던 포크를 완전히 내려놓고 냅킨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아버지의 포크와 나이프를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가까이 지내서 안 좋을 것 하나 없는 집안이다. 물론 성진수나 그 아들놈이나 상종할 만한 인간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업 파트너로는 대하라는 말이야.”
“저는 사업에 안 맞나 봐요.”
“뭐?”
“저는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으니. 저기 앉아 있는 우진이에게나 물려주세요. 그 사업이라는 거.”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저를 올려다보는 아버지를 쳐다보다 제 일인 양 안절부절하지 못 하는 여자를 쳐다보다.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박우진을 마지막으로 문을 열었다.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 못 된 게 분명하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지금 제가 변기를 부여잡고 쓰린 속을 달랠 이유가 없으니까. 한바탕 뒤집은 속은 더 나올 것도 없음에도 계속 하얀 위액만 내 보이고 있었다. 시큼한 목에 절로 눈물이 차오르는데.
“그러게 왜 꾸역꾸역 억지로 먹고 있어.”
뒤에서 들리는 건 박우진의 목소리인지라. 가득 고여 있는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위액을 있는 힘껏 뱉어 냈다. 지금은 내가 너를 마주할 정신도 없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가라는. 그런 뜻으로.
“너도 참. 무식하다.”
제발 좀 꺼지라고. 한 마디 쏘아주려 고개를 치켜드는데, 제 등에 닿아오는 손이 낯설어서. 무어라고 하지도 못 하고 또 치켜든 고개를 다시 숙여 위액을 뱉어 내지도 못 하고 있으니. 제 등에 닿아 온 손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박우진이 얕은 숨을 내뱉었다.
“때와 장소를 좀 구분할 필요가 있어, 너는.”
“꺼져, 제발.”
“너는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처럼 굴지.”
너는 그저 외로운 것뿐인데.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양 구는 박우진의 손을 세게 내치고 촉촉하게 젖은 입가를 대충 닦아 냈다.
“나는.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형섭아.”
대체 네가 무얼 안다고. 다시금 닿아오는 손을 어쩌지도 못 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다가오는 박우진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저를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박우진에게 무너졌다.
비참하게도. 그토록 혐오하던 그 박우진에게.